20세기에 가장 많이 읽히고 인용되는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 그의 에세이집 《피고석의 하나님》은 루이스의 변증 주제를 광범위하게 볼 수 있는 책으로, 신학적, 윤리적 질문들로 구성된 48편의 글을 모은 것이다.
루이스는 하나님이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왜 기독교가 참된 종교인지, 기적은 있는지, 있다면 어떤 목적이 있는지 등 사람들이 묻는 질문들을 먼저 자신에게 던져 보았다. 1931년 회심한 루이스는 강연 요청이나 원고 청탁을 거의 거절하지 않았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동료 교수, 노동자, 공군 장병, 대학생들에게 루이스는 기독교를 이야기하고 논쟁했다. 이런 경험에 힘입은 그는 신학자들이 기독교를 쉽게 전달하지 못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일반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그 견해를 철저히, 끝까지, ‘완전히 끝장을 볼 때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어로 복음을 ‘번역하는’ 임무를 자임한 루이스는 재치와 위트가 번득이는 현대 산문으로 기독교를 뛰어나게 표현했다.
다양한 매체에 실렸던 이 글들은 다양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쓰였으며, 다각도에서 기독교를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 신문에 기고한 대중적인 글부터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옹호하며 쓴 글까지, 난이도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피고석의 하나님》은 루이스의 정직성과 현실성, 통찰력과 확신, 무엇보다 철저한 기독교 신앙이 잘 드러나 있다.
[책 속으로]
우리는 사건들을 일으키는 방법 두 가지, 즉 노동과 기도를 허락받았습니다. 노동과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알아서’ 제공하심을 합당하게 여기지 않으신(적어도 아직까지는) 사태들을 일으키려 노력합니다. 이 점에서 둘은 동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동은 기도다laborare est orare”라는 오래된 속담은 새로운 의미를 띱니다. 밭의 잡초를 뽑을 때와 풍작을 달라고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_132쪽, ‘1부 11. 노동과 기도’에서
제가 말했습니다. “구체적인 일을 놓고 기도하는 건 말이지 하나님께 세상을 어떻게 운영하시라고 조언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하나님이 가장 좋은 일을 아신다고 생각하는 게 더 지혜롭지 않을까?”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 원리를 따르자면, 자네는 식탁에서 옆 사람에게 소금을 달라고도 하지 않겠구만. 하나님은 자네에게 소금이 있어야 하는지 아닌지 가장 잘 아실 것 아닌가. 자네는 우산도 쓰고 나가지 않겠구만 그래. 자네의 몸이 젖어야 할지 말라야 할지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실 테니 말일세.”
“그건 전혀 다르지.” 제가 항의했습니다.
친구가 말했습니다.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군. 이상한 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건들의 경로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하셨다는 사실이야. 그런데 하나님이 한 가지 방식으로 그 일을 허락하셨다면 다른 방식으로 그 일을 허용하셔서는 안 되는지 나는 이유를 모르겠네.”
_290쪽, ‘2부 7. 단편들’에서
우리의 문제는 종종 단순한 번역 문제입니다. 목사 안수 시험에는 표준적인 신학 서적의 한 구절을 일상어로 번역하는 문제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힘이 많이 들겠지만 금세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교리들을 일상어로 번역하다 보면 우리 자신이 그 교리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번역이 잘 안 된다면, 그 이유가 일상어에 무지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훨씬 많은 경우, 그것은 우리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_328쪽, ‘2부 12.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그런데 지적인 기계공이나 진지한 호기심이 있지만 겉으로는 상당히 불경해 보이는 학생에게 자신의 그 견해를 설명하려고 해보십시오. (식자들 사이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을) 유치한 질문들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검술의 첫 번째 원칙조차 모르는 상대의 칼에 어이없이 꿰뚫린 능숙한 검객의 신세가 됩니다. 상대의 유치한 질문은 치명적인 한 방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주장했던 내용을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견해를 철저히, 끝까지, ‘완전히 끝장을 볼 때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_348쪽, ‘2부 15. 의사소통의 전제 조건’에서
존슨 박사가 말한 것처럼, 가르침은 매우 진실(게다가 대단히 유익)하면서도 실행은 대단히 불완전할 수 있습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의사가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해도 알코올 중독에 대한 그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염려했던 것은 그 목사님이 가정생활은 만만치 않고 삶의 모든 영역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고유한 유혹과 부패가 따른다는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계속 ‘가정’이 행복과 미덕을 낳을 수밖에 없는 만병통치약, 마법의 주문인 양 말합니다. 그가 진실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바보라는 게 문제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정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감상적인 전통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하필 그것이 잘못된 전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_386쪽, ‘3부 3. 설교와 점심 식사’에서
· 변증: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기적》 《인간 폐지》
· 소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천국과 지옥의 이혼》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순례자의 귀향》《침묵의 행성 밖에서》 《페렐란드라》 《그 가공할 힘》
· 고백: 《예기치 못한 기쁨》 《헤아려 본 슬픔》
· 에세이: 《세상의 마지막 밤》 《영광의 무게》 《기독교적 숙고》 《피고석의 하나님》
《실낙원 서문》 《오독》 《이야기에 관하여》 《현안》
· 산문 및 서간: 《시편 사색》 《네 가지 사랑》 《개인 기도》 《당신의 벗,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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